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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물고기 자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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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Bibiane 작성일24-09-02 22:47 조회3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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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주려라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한다. ​이 가난이 단순히 물질적 가난이 아니라는 건 다른 게시글에서 나눈 다른 성경 말씀이나 성경의 인물들만 보아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서는 선주들도 있었고 삭개오나 니고데모, 아리마데 요셉 같은 사람들은 부자였다. 구약만 가보아도 하나님의 사람 가운데 재물 많은 부자들은 많았다. 그중에는 왕도 있었다.​그럼 위 말씀에서의 가난함이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면 어떠한 것도 채울 수 없는 영적인 가난함임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세상의 것을 아무리 많이 가져도, 이 세상이 가치라고 주장하는 것들을 아무리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말씀을 향한 갈급함인 것이다. 오직 그 말씀만으로 채워질 수 있는 상태인 것이다. 성도는 반드시 하나님만으로 채워져야 하는 그 가난한 자리로 가게 돼 있다.​아래는 어느 온라인 금융교육에 관한 객관식 문제 중 하나이다.나라에서 하는 서민대출을 받으려면 온라인 금융교육강의를 듣고 문제를 풀어야 하는데 요즘에는 위와 같이 현실을 반영한 지문으로 문제를 만들더라는 것이다.​1. 만일 우리가 돈이 없다면 일상 생활에서 어떤 의사 결정도 자유롭게 내릴 수 없다.2. 우리 몸을 경제에 비유한다면 금융은 심장과 같다. 그러면 우리 몸의 피(혈액)는 돈에 비유할 수 있다.​위에 문제를 풀어본 사람이 있다면 알다시피 위에 1번과 2번은 돈에 관한 내용으로 맞는 선택지이다. 인간들이 주장하는 의사 결정의 자유라는 것이 결국 돈의 유무에 따라 결정이 된다고 돈에 관한 옳은 설명이라고 주입시키더라는 것이다. 또 인간의 심장은 금융이고, 주려라 그 피는 돈으로 이루어지는 세상임을 국가 금융위원회 산하의 기관이 문제랍시고 내어놓더라는 것이다. 서민대출받기 위해서 해당 강의를 듣고 문제를 푸는 이들 가운데 위와 같은 내용을 부인할 사람은 아마 없어 보인다.​세상 정부가 인간의 자유는 돈에 있고, 금융은 우리의 심장이며 우리 몸의 피는 돈이야.라고 비록 비유이지만 그렇게 우리에게 주입하고 있다. 참 슬프게도 이와 같은 정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인간은 한 사람도 없다. 모든 인간은 돈에 묶여 있고, 돈에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삶을 살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자유를 가지고 있고, 자유의지를 가진 것처럼 행동하지만 정작 돈의 유무에 따라 우리의 환경과 처지와 선택지는 셀 수 없이 달라진다. 그들의 몸의 피는 돈이니까. 피가 없으면 살 수 없듯, 돈이 없으면 죽는 것이다. 일이 잘못되거나 사업에 실패하면 당장 목부터 매달 생각을 하는 것이다.​그런데 하나님의 어떠한 은혜로 주 예수의 마음을 받아 예수의 심장을 가지게 되었고, 그 몸을 예수의 살과 피로 채우는 기이한 이들이 있으니 곧 택하심을 입은 성도들이다. 자기 몸의 피를 날마다 맘몬으로 채우는 세상과 예수로 채우는 그리스도인은 물과 기름과 같다. 그런데 그 두 부류의 것을 자기 육체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경험하는 이들이 곧 성도들이기도 하다. 이 죄와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지랴.라고 외친 사도의 고백처럼 돈, 인간의 행위와 가치, 곧 맘몬에 의해 이끌림을 당하는 이 육을 날마다 사형선고 내리는 그 자리가 성도가 지향해가는 심령의 가난함인 것이다. 주려라 하나님은 전부,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그 가난함.​우리의 경험에서 미루어보듯 이 땅의 삶에서는 좀처럼 쉼이 없다. 맡은 일들이 많을수록, 해야 할 일들과 생각해야 할 일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러하다. 어떠한 환경에 처해 있고, 경쟁 사회에 내몰린 우리는 끝없이 달려야 한다. 우리가 주체가 되어 끌고 나가는 게 아니라 우리의 일상과 환경이 우리를 끌고나가고 있다.​대출을 받아야 할 때는 은행을 여러 군데 방문해야 하고 서류도 빠짐없이 잘 준비해야 한다. 심사 결과가 나올 때까진 숨 죽여 기다려야 한다. 다른 대출 심사와 맞물릴 때는 혹시나 하나라도 나오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기 일쑤이다. ​이사를 갈 때는 업체를 여러 군데 연락해서 견적을 확인해 봐야 하는데 왜냐하면 업체마다 부르는 비용이 천차만별이다. 대체로 일반이사, 반포장이사, 포장이사로 나누고 있는데 업체가 부르는 게 값인 것 같다. 같은 걸 봐줘도 누군 120을 부르는 곳이 있는가 하면 어떤 곳은 그날은 바쁜 시기라며 90, 어떤 곳은 별로 짐이 없다고 보고 45로 부르기도 한다. 하나는 포장이사, 또 하나는 반포장이사, 다른 하나는 일반이사라고는 하지만 같은 업계의 사람이 견적낸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보는 사람에 따라 차이가 굉장히 크다. 잘 모르고 한두 곳만 견적 냈다간 짐이 별로 많지도 않은 가정집이 90만 원, 120만원씩 내고 이사를 가는 일도 허다할 것이다. ​인간이 판단하는 일이 이런 것이다. 전문가랍시고 자기를 중심으로 유익이 되는 쪽으로 뭐든지 끌어당기게 돼 있다. 그러므로 기준 주려라 같은 것도 애매모호한 것이다. 포장이사는 가정주부까지 포함된 3인 이상의 사람이 와서 짐을 싸고 옮기는 하나부터 열까지 다해서 가장 비싼 이사라 치면, 반포장이사는 일부 짐은 업체가 포장하고 나머진 직접 포장하는 방식이고 일반이사는 짐을 전적으로 직접 포장하고 이사하는 방식이라고 하는데 가장 저렴한 일반이사로 해도 큰짐(가구, 가전제품, 냉장고, 침대, 세탁기 등)은 포장까지 해준다고 한다. 얼마를 더 추가하면 벽걸이 에어컨까지 해체하고 옮겨준다고 하니 잔짐들만 잘 싸두면 일반이사로 하는 편이 많게는 5-60만원 이상 절감하는 셈이다. ​이런 것들을 겪어보고 직접 부딪혀보지 않고서는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런데 같은 내용을 보고 이사 비용으로 90만원, 100만원 이상을 부른 업체를 함부로 평가할 수도 없는 것이 신자라고 하는 우리도 얼마든지 우리의 상황과 여건에 따라서 우리에게 더 유익이 되는 쪽으로 끌어당기며 비슷한 방식으로 요구하지는 않을까, 아니 그보다 더 하지는 않을까 하는 안타까운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우리는 사업을 하든 어떠한 일을 하든 얼마든지 우리 앞에 다가온 대상을 우리가 뜯어먹어야 하는 대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중심에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같은 천국 백성의 형제이든 아니든 이생에서의 나의 보다 나은 유익을 위해, 아니 내가 조금이라도 손해보지 않기 위해 내 앞에 타자를 향해 더 많은 것을 뜯어내야 한다. 마치 이것이 가난한 자를 압제하고 공의롭게 판단하지 못하냐며 구약 내내 질타를 받은 이스라엘 같지는 않은가?​구원 받았다고 하는 우리 안에서 여전히 주려라 잔재하고 있는 구약의 압제자 이스라엘이 어떻게 남 얘기라고만 할 수 있을까? 이렇듯 선악 판단의 주체로 선 예수 죽인 그 사망의 몸을 항상 보는 것이 신자의 실상인 것이다. 그래서 신자만이 그것들로 말미암아 아프고 통곡하고 애통하고 심령의 가난함으로 밀려가게 것이다. 내가 죄인 중의 괴수가 맞구나 하는 그 애통함. ​(눅 6:20-23)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gt설날에 새배하는 아이들에게 할아버지, 할머니, 부모님들이 세뱃돈 손에 쥐어주며 복 받아라 해주는 게 덕담인데, 너희는 한해동안 애통하고 가난하며 주려라. 지금 울고, 사람들로부터 욕먹고 핍박당하고 버림 받아라. 그게 복이야.&quot하는 걸 덕담이랍시고 받았다면 여러분은 뭐라고 하겠는가? 성경은 그걸 복이라고,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건 별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 복을 같이 빌어줄 수 있는 이가 참 성도인데, 우리는 우리 자식들과 가족들에게도 이런 복은 결단코 빌어주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거스르는 죄인 아닌 인간이 누구 한 사람 있는가? 없다. 주려라 다 예수 죽인 죄인들이다. 그중 은혜의 성령이 가입한 소수의 하나님 백성들만이 이 인생과 역사를 바라보며 인생과 역사를 고스란히 축약하고 있는 자신을 보며 애통하게 돼 있다. ​이 세상을 축약하고 축약해서 우리 눈에 보이는 것으로 하나만 표현하면 '나'라는 존재가 떡하니 나오더라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만큼 눈에 보이고 더 확실하고 분명한 세상이 어디에 있는가? 그 죽을 수밖에 없는 세상을 사랑하시어 아들을 통하여 건지실 수밖에 없는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가는 일상이 우리의 신앙생활이라는 것이다. ​예수가 건지지 않았으면 어쩔뻔하였을까. 세상이 보여주는 그대로 따라가고자 하는 우리 안에 탐심을, 우리 안에 세상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아버리지 않았으면 어쩔뻔하였는가를 날마다 알아가는 신앙생활. 그것이 날마다 죽는 것이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른다고 하는 것이다. 그 하늘 아버지의 의를 알아주는 신앙생활. 그래서 성도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다. 그들이 저지른 실수와 죄조차도 끝끝내 의를 알고, 선을 알고, 진리를 알기 위해 허락하셨음을 알았다면 그들에게 일어난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다. 이걸 복음이라고 한다. 우리는 그 안에서만 용서가 이루어지고 아들을 통하여 동일한 사랑을 전할 수 있다. 거기서만 말씀을 묵상하며 이 일상에서는 늘 이렇게 불안하고 쉬지 못하고 초조하고 답답하고 고통스럽지만 하나님께서 용서하셨고 이미 완료하셨고 사랑하신다 하시니 그 나라를 저의 소망으로 간직합니다.하고 고백할 수 있다. 그 안에서만 이미 안식에 들어간 쉼을 잠깐 잠깐이라도 맛볼 수 있다. 소망을 품을 주려라 수 있다. 그 나라에서만 진짜 쉼이 있구나 하고.​물론 이 육을 입은 이 세상에서 우리는 온전한 안식을 누릴 수는 없다. 모세의 시편처럼 주의 분노 가운데 끝없이 수고와 피로가 있을 것이고, 끝없이 선택을 해야 하며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야 할 것이다. ​요즘 필자가 느끼는 것이 뭐냐 하면 왜 이렇게 선택해야 할 것이 많냐는 것이다. 끝없이, 정말로 죽는 순간까지 선택하는 게 고역이더라는 것이다. 모든 선택이 내 중심이며 내가 보기에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러운 것들을 나를 위해 끝없이 선택해야 하는 것이 참 힘들더라는 것이다. 심지어 오늘 어디에 가서 한 끼 뭘 먹어야 하지 하는 작은 고민까지도.​하나님이 문지기를 하라 하시면 그걸 하는 것이 제일이고, 하나님이 죽기까지 만나만을 먹으라 하시면 그것이 옳은 것이며, 하나님이 가장 손해보는 길로 가라 하시면 그것이 선인데 필자가 필자 자신을 위해 선택하는 모든 것이 고통이더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러한 모든 일들을 협력시켜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신앙하며 또 그 가운데 하나님의 아들을 나타내며 한 걸음 한 걸음 성도인 우리가 나온 그곳으로 다시 회귀하는 길을 걷고자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생명나무로 가는 그 길을 열어놓으셨으니, 오늘도 그 하늘의 길을 따라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내딛고자 한다.​(미 2:12-13) 야곱아 내가 반드시 너희 무리를 다 모으며 내가 반드시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모으고 그들을 한 처소에 두기를 보스라의 양 떼 같이 하며 주려라 초장의 양 떼 같이 하리니 사람들이 크게 떠들 것이며 길을 여는 자가 그들 앞에 올라가고 그들은 길을 열어 성문에 이르러서는 그리로 나갈 것이며 그들의 왕이 앞서 가며 여호와께서는 선두로 가시리라(사 45:2-3) 내가 너보다 앞서 가서 험한 곳을 평탄하게 하며 놋문을 쳐서 부수며 쇠빗장을 꺾고 네게 흑암 중의 보화와 은밀한 곳에 숨은 재물을 주어 네 이름을 부르는 자가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줄을 네가 알게 하리라 -&gt생명나무의 길을 우리의 왕이신 예수께서 앞서가시고, 여호와께서 선두로 가신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우리는 그 길을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뿐이다. ​(사 45:5-7)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나 밖에 신이 없느니라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 띠를 동일 것이요 해 뜨는 곳에서든지 지는 곳에서든지 나 밖에 다른 이가 없는 줄을 알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요 21: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gt그것이 설령 우리 자신을 완전히 부인시키고 삭제시키는 십자가일지언정, 우리에게 띠 띠우시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시는 분에 따라 끌려갈 뿐이다. 주의 포로가 된 가난한 자들에게 복이 있기를. 주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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