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나눔] 가위 하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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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oreo 작성일25-06-21 10:25 조회1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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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나눔] 가위 하나로
[빛, 나눔] 가위 하나로 60년 봉사 활동 김광주 씨가난한 손끝에서 시작된 진짜 나눔[편집자주] 내 가족, 내 동네, 내 나라라는 표현보단 우리 가족, 우리 동네, 우리나라라는 말이 더 자연스럽다. 우리들 마음에 '공동체 정신'이 녹아 있어서다. 자신의 빛을 나눠 우리 공동체를 밝히는 시민들을 소개한다.광주 북구 용봉동의 한 아파트에서 평생 미용 봉사를 해온 김광주 씨(87)가 대통령 표창을 가슴에 달고 웃고 있다. 2025.6.21/뉴스1 ⓒ News1 박지현 기자(광주=뉴스1) 박지현 기자 = "초등학교밖에 못 나온 제가 대통령 표창까지 받았어요. 그냥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인데…."토요일 아침 광주 북구 용봉동의 한 주공아파트 계단 앞. 나무 의자 하나, 거울 하나, 그리고 닳아진 가위와 빗. 이 소박한 공간에서 김광주 씨(87)는 오늘도 누군가의 머리를 정성껏 다듬는다.그가 지금까지 무료로 머리를 잘라준 사람은 무려 4만 명.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였던 그의 손끝에서 웃음을 되찾은 사람은 수만 명이다. 김 씨의 이발 도구에는 수십 년간의 무상 봉사와 따뜻한 마음이 켜켜이 쌓여 있다.김 씨의 봉사는 거창한 시작이 아니었다. '이웃이 깨끗해야 내 마음도 깨끗하다'는 생각으로 그는 자신의 기술을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기꺼이 내어주었다. 처음엔 해남 고향에서, 그리고 지금은 광주에서 봉사를 이어가고 있다. 김 씨는 "어려운 사람 많은데 나도 그랬다. 돈 한 푼 없이 시작했다"며 "그래도 나에게 손은 있었다. 기술 하나로 버틴 것"이라고 말했다. 가난했던 유년기 중학교도 못 가고 일찌감치 집을 나와 서울과 부산을 떠돌았다. 영도다리 밑 이발소에서 기술을 배웠다. "밥만 먹여주면 뭐든지 하겠다"고 말하며 들어갔다. 손님 머리를 털다가 혼나고, 머리 감기고, 연탄불에 고데기를 달구던 날들을 그는 잊지 않는다.그는 "서울서 굶어도 봤고, 부산에선 구두닦이도 해봤고, 신문도 팔았다. 그러다 이발 기술을 익힌 게 내 평생 자산이 됐다"고 했다. 기술을 배워 내려간 해남에서 그는 처음 자신의 이발소를 열었다. 이후 30년동안 지역 아이들 10명씩을 정해 무료 이발을 이어갔다. 결혼을 앞둔 청년들에게는 고급 화장품과 서비스도 아끼지 않았다. 또 20명 넘는 직원들을 키워냈고 그들 대부분은 독립해 자신만의 가게를 열었다.평생 미용 봉사를 해온 김광주 씨(87)의 광주 북구 용봉동에 위치한 아파트에 각종 표창이 진열돼 있는 모습.2025.6.21/뉴스1광주로 올라온 건 30여 년 전이다. 사람은 어떻게 살[빛, 나눔] 가위 하나로 60년 봉사 활동 김광주 씨가난한 손끝에서 시작된 진짜 나눔[편집자주] 내 가족, 내 동네, 내 나라라는 표현보단 우리 가족, 우리 동네, 우리나라라는 말이 더 자연스럽다. 우리들 마음에 '공동체 정신'이 녹아 있어서다. 자신의 빛을 나눠 우리 공동체를 밝히는 시민들을 소개한다.광주 북구 용봉동의 한 아파트에서 평생 미용 봉사를 해온 김광주 씨(87)가 대통령 표창을 가슴에 달고 웃고 있다. 2025.6.21/뉴스1 ⓒ News1 박지현 기자(광주=뉴스1) 박지현 기자 = "초등학교밖에 못 나온 제가 대통령 표창까지 받았어요. 그냥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인데…."토요일 아침 광주 북구 용봉동의 한 주공아파트 계단 앞. 나무 의자 하나, 거울 하나, 그리고 닳아진 가위와 빗. 이 소박한 공간에서 김광주 씨(87)는 오늘도 누군가의 머리를 정성껏 다듬는다.그가 지금까지 무료로 머리를 잘라준 사람은 무려 4만 명.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였던 그의 손끝에서 웃음을 되찾은 사람은 수만 명이다. 김 씨의 이발 도구에는 수십 년간의 무상 봉사와 따뜻한 마음이 켜켜이 쌓여 있다.김 씨의 봉사는 거창한 시작이 아니었다. '이웃이 깨끗해야 내 마음도 깨끗하다'는 생각으로 그는 자신의 기술을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기꺼이 내어주었다. 처음엔 해남 고향에서, 그리고 지금은 광주에서 봉사를 이어가고 있다. 김 씨는 "어려운 사람 많은데 나도 그랬다. 돈 한 푼 없이 시작했다"며 "그래도 나에게 손은 있었다. 기술 하나로 버틴 것"이라고 말했다. 가난했던 유년기 중학교도 못 가고 일찌감치 집을 나와 서울과 부산을 떠돌았다. 영도다리 밑 이발소에서 기술을 배웠다. "밥만 먹여주면 뭐든지 하겠다"고 말하며 들어갔다. 손님 머리를 털다가 혼나고, 머리 감기고, 연탄불에 고데기를 달구던 날들을 그는 잊지 않는다.그는 "서울서 굶어도 봤고, 부산에선 구두닦이도 해봤고, 신문도 팔았다. 그러다 이발 기술을 익힌 게 내 평생 자산이 됐다"고 했다. 기술을 배워 내려간 해남에서 그는 처음 자신의 이발소를 열었다. 이후 30년동안 지역 아이들 10명씩을 정해 무료 이발을 이어갔다. 결혼을 앞둔 청년들에게는 고급 화장품과 서비스도 아끼지 않았다. 또 20명 넘는 직원들을 키워냈고 그들 대부분은 독립해 자신만의 가게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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