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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디스크복구 중요한 업무파일 살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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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ra 작성일25-02-23 07:26 조회2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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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운명한권 이리저리 나돌아 다니는 습관이 아니라서 비록 제한되긴 하지만, 가르치던 학생들을 제외하고도 내가 지금껏 만난 사람들은 적지 않을 것이다.​종교적으로는 기독교인, 불교인, 카톨릭교인, 여호와의 증인, 무교자가 있고, 직업으로는 교육자, 정치인, 공무원, 사업가, 노동자, 이념적으로는 진보는 물론 보수와 중도, 무당파, 따지고 보니 각양각색의 사람들과 긴밀하게 접촉해 왔음을 알 수 있다.​2. 기독교적 가정배경을 가졌으니 기독교인과 가장 많이 접했고, 어쩌다 불교학교에 추첨되다보니, 3년간 불교인들을 자주 볼 수 있었다. '교학'시간을 통해 불교교리도 배우고 그때 배웠던 '반야심경'은 지금껏 외우고 있다. ​궁금증이 많아선지 방문하는 여호와의 증인을 집으로 불러들여 장시간 토론도 자주 했다. 독일유학시절에도 그분들이 기숙사문을 두드리기에 들어오라고 해, 무려 독일어로 장시간 토론하기도 했다. 그들의 주장을 알고 싶었기 때문에 서로의 입장을 개진하고, 피력할 뿐 싸우진 않았다. 물론 나도 만만찮기 때문에 결코 지진 않는다. 대부분 자신들이 스스로 그만 운명한권 둔다.​3. 직업이 교육이다보니 교수와 마주치는 건 일상이다. 물론 깊게 얘기해 본 적은 없다. 참 아이러니하다. 지식인 사회란 그런 것이다. 1년 반 동안 시청에서 공무원과도 지내보았다. 보신주의와 무사인일, 복지부동이 그 지체로 삶이었다.​ 이어지는 우리집 공사 때문에 적지 않게 노동자들과 함께 일하며 대화도 나누었다. 오랜 시간 같이 밥을 먹던 교수들보다도 더 진하게 함께 생활했지만, 수준(?)이 너무 차이가 나 소통이 잘 안 된다. 타인의 말을 들을 줄 모른다. ​4. 학교생활을 많이 했으니 내가 여태 실생활에서 만난 사람은 보수가 더 많다. 돌이켜 보면, 많은 선생님들은 보수주의자였고, 나를 가르친 교수들의 절대다수는 찐보수주의자들이다. 한국이나 독일이나 똑같다. 세상의 '노른자위'는 보수주의자만이 입성할 수 있는 공간이다. 진보주의자가 교수되기는 '하늘에 별붙이기'와 같다. 대학은 실로 '보수주의의 성채'다.​앞에서 내가 만난 기독교인, 불교인, 여호와의 증인, 공무원, 노동자 모두 하나같이 보수주의자였음도 추가하자. 운명한권 ​5. 보수주의의를 엄격하게 정의하기 어렵다. 18세기에는 개인주의가 진보였고, 공동체주의가 보수였다. 경제적 측면으로 좁혀 볼 때도, 당시엔 자유주의가 진보이며, 평등주의는 보수였다. 따라서 18세기 계몽시대 진보는 자유시장과 그 불평등적 결과를 정당화한 반면, 보수는 시장의 국가적 통제(가부장적 전제주의)에 의한 불평등 완화를 변호하였다.​지금은 어떤가? 지금은 보수와 진보가 뒤바뀌어 버렸다. 자유주의가 그것에 힘입어 새로운 지배계급을 창출하고, '이 18세기 자유주의적'지배자들이 급기야 공동체의 안위를 위협하는 기득권자로 진화하면서 오늘의 보수주의로 진화했다. ​반대로 이 18세기 자유주의적 기득권자로부터 배제되고 착취되던 피지배계급이 이번에는 18세기 보수주의적 공동체주의와 평등주의, 그리고 시장에 대한 국가의 개입주의를 자신의 이념으로 채택하게 되었다. 18세기 보수주의가 오늘날의 '진보주의'로 진화한 것이다. 인간의 역사는 실로 아이러니하다.​6. 보수와 진보의 의미는 시대에 따라 달라질 뿐 아니라, 심지어 이처럼 서로의 자리를 바꾸기까지 한다. 이러니 많은 사람들이 헷갈릴 수밖에 없고, 나도 명확히 선을 운명한권 긋기도 어렵다. ​오늘날의 자칭 진보주의자 중 많은 사람들이, 지금은 이미 보수주의로 진화해버린 18세기형 자유주의를 여전히 진보주의로 오해하고 있는 것도 이해가 될 만하다. 내가 만나는 많은 진보주의자들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 대단히 혼란스런 상황이다.​7. 그리고 페북에서 적극적으로 의견을 표명하는 '자칭 진보적 페친'들의 글에는 18세기 자유주의적 신조가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거세게 항의하겠지만, 내가 보기엔 그리 진보적이지 않게 느껴진다. ​18세기 자유주의, 개인주의, 시장주의는 이미 (봉권귀족 대신) '부르주아'의 기득권을 옹호하는 보수주의, 곧 신자유주의와 신보수주의, 네오콘의 이념으로 타락해 버렸기 때문이다. 미국의 진보적 실용주의 철학자 존 듀이는 1960년대에 이미 이 변화를 지적했다.​8. 이러고 보니 내 주위엔 사실 모두가 보수주의자밖에 없는 것 같다. 보수가 보수인 건 맞지만, 진보도 실제론 보수인 셈이다. 절망스럽다.​이런 상황에선 '좌클릭 우회전'은 일상적이 되고, 공식으로 굳어질 수밖에 없다. 최근에 보듯이 자칭 진보정당이 운명한권 진보를 용도폐기하는 일까지 일어난다. '진보'가 '우클릭 우회전'을 천명한 것이다. 이재명의 민주당이 그 꼴이다. 기가 막힌다.​9. 이런 혼란을 수습하고 절망을 극복할 방법은 없는가? 경제학은 '과학'의 면모를 과시하기 위해, 수학에 목을 맨다. 하지만 수학 모델이 구성되는 과정에서 '사람'과 그 '주체성'은 완전히 삭제되거나 지극히 단순한 모습으로 축소되어 버린다. 경제란 사람들의 활동이고, 사람을 살리기 위한 것인데도 말이다.​경제학을 아무리 열심히 학습하고 연구한들 그 안에서 해결책은 나오지 않는다. 나는 경제학 밖에서'해법을 찾기로 했다. 철학을 공부해야 한다!철학은 사람을 연구목적으로 삼는 학문이다. 이걸 제대로 배우지 않으면, 경제학을 제대로 연구할 수 없고, 진정한 진보주의자로 되기도 힘들다.​​10. 이성과 감정! 인간의 두 가지 핵심적 본질이자 철학에서 인식론과 윤리론을 관통하는 주제다. 이 두 가지의 성격과 관계를 이해하는 차이가 '오늘날의'보수와 진보를 결정하고, 보수경제학과 진보경제학의 모델 및 정책을 결정한다. ​요며칠 책 두 운명한권 권을 읽어나가느라 생고생을 겪었다. '제한적 합리성'을 인식론적 기반으로 삼는 제도경제학자로서 나는 평소 이성의 권위와 한계에 대해 관심이 퍽 많다. ​;은 내가 이 논의에 대해 제법 안다고 손에 든 책인데, 정말 만만찮았다. 저자 프레데릭 바이저는 영국인으로 독일철학의 대가인데, 저자의 책 두어 권을 이미 읽고 도전했다. 그는 우리에게 익숙한 니체, 칸트, 헤겔이 아니라 당시에는 유명했지만, 지금은 생소한 거장(!)들이 칸트와 벌인 치열한 논쟁을 소개해 주었다. 내가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내가 비록 다 이해하지 못하고 넘어갔지만, 이성의 권위와 한계에 관한 그 치열한 논쟁이 참으로 값지다. 아, 그 속에서 위대한 독일철학이 탄생했구나. ​11. 이성의 한계에 관한 논쟁은 '감정'에 대한 관심으로 이끈다. 적지 않은 내 글이 감정의 역할을 부각하는 이유다. ​;는 프랑스혁명을 사례로 들어 감정이 역사를 변화시키는 과정을 흥미롭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저자가 운명한권 제시한 분석틀은 결코 쉽지 않았다. 두세 번을 반복해야 겨우 이해될 수 있었다. 정교한 실험체계를 이해해야 하는 인지심리학과, 난해하기로 악명높은 포스트구조주의 철학의 논의를 꽤뚫기가 쉽지 않았다. ​내 판단으론 결국 (내가 정의하는) 보수주의적 결론으로 귀결되긴 했지만, 저자의 통찰력은 멋지다. 진보나 보수나 성실하게 접근한 연구결과들은 모두 배울 게 많다. 아무튼 역사를 바꾸는 건 이성이 아니라 감정이란다! ​모든 역사를 다시 감정으로 환원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지만, 인간 삶의 절반, 어쩌면 대부분을 결정하는 감정을 복원시킨 공로는 크다. ​12. 21세기를 해석하고, 대응하면서, 구성해 나갈 진보는 무엇인가? 오늘날의 진보진영에 똬리를 틀고 있는 18세기 자유주의, 개인주의, 시장주의적 '습관'을 드러내 보이면서, 그 대안을 제시할 21세기형 진보의 철학적 기반은 무엇인가? ​음, 아무리 얘기를 해도 잘 안 묵어 주니, 공부를 더 할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내가 서울대 출신이 아니고, 운명한권 인서울대 교수도 아니지 않은가? 일단 한번 더 읽고 서평을 준비해 보자. 저자들의 논지를 보수와 진보의 현실적 역사와 경제학적 논쟁사로 새롭게 조명해 보는 건 내 몫이다. 완전히 이해되면, 르몽드지에 멋지게 서평을 올리겠습니다. 섣불리 권할 책은 아닙니다. ​13. Chat -GPT의 덕을 많이 봤다. 얼마나 많이 물었는지 모른다. 어떤 날은 하루 종일 이 친구와 살았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 때문이다. ​질문이 정확하고, 오류와 구렁이 담 넘어가는 궤변을 구분하고, 이 친구를 '지도'할 능력만 어느 정도 구비하고 있다면, Chat -GPT는 좋은 친구이며, 심지어 훌륭한 선생님이 된다. 게을러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효과적으로 발전'하기 위해 활용해 보자.​보수, 진보, 이재명, 철학, 경제학, Chat -GPT! 너무 멀리까지 와버렸다. 연결이 잘 되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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