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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AMON300 ] 주식 수익 만들기 - 세균 vs 바이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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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Talia 작성일24-11-09 10:02 조회1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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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쓰비시 홍콩 미러 급 레플리카 자동차최근 수정 시각: 2020-11-10 11:28:57분류 르노-닛산-미쓰비시 얼라이언스전범기업/일본 제국일본의 자동차 제조사1970년 기업일본의 자동차 브랜드[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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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菱自動車工業株式会社Mitsubishi Motors미쓰비시자동차공업주식회사







정식 명칭三菱自動車工業株式会社영어 명칭Mitsubishi Motors한국어 명칭미쓰비시자동차공업주식회사창립일1970년 4월 22일수뇌부마스코 오사무 (대표취체역 CEO 겸 회장)본사 소재지일본, 도쿄 미나토산업 분야자동차 산업모기업닛산자동차(르노-닛산 얼라이언스)[1]매출액연결: 2조 5,145억 9,400만 엔 (2019년 3월 기준)순이익연결: 1,328억 7,100만 엔 (2019년 3월 기준)홈페이지글로벌 일본​​1. 개요[편집]정식명칭은 미쓰비시자동차공업주식회사 (三菱自動車工業, Mitsubishi Motors Corporation). 한국에는 '미쓰비시 모터스'명칭으로 진출했다. 과거에는 이름처럼 미쓰비시그룹의 계열 기업이었으나, 2016년 르노-닛산 얼라이언스의 새로운 구성원이 되었다.[2]​







태생이 미쓰비시 그룹인지라 예나 지금이나 쓰리 다이아몬드 로고를 사용하지만, 70년대 후반~80년대에는 일본 내수용 한정으로 사명의 영문 이니셜 'MMC'를 도안화한 로고와 병용하기도 했다.​일본 내에서는 경차부터 대형승용차까지 다양한 차종을 생산하고 있었으나 해외시장에서 주력으로 수출하고 있는 차종들은 대개 위에서 말한 C세그먼트급의 모델이 아닌 이상 SUV 모델로서, 그 라인업이 충실하지는 않은 편이다.2. 설립과 전성기[편집]원래는 미쓰비시 중공업 산하 자동차 사업부였다. 1960년에 나온 '미쓰비시 500', 1962년 '미니카'라는 경차를 시작으로 승용차 업계에 뛰어들기 시작, 1963년 콜트1000, 1969년에는 갤랑을 내놓더니 1973년 랜서의 첫 모델을 내놓게 된다. 그리고 1974년에는 아프리카 사파리 랠리를 완파하여 유명세를 떨치게 된다.​1970년 2월, 미쓰비시 중공업이 미국 크라이슬러와 합작사업에 관한 계약을 체결했고, 그 해 4월 22일. 미쓰비시 자동차로 물적분할되었다. 1971년부터 제휴선인 크라이슬러를 통해 갤랑을 수출하기 시작했으며[3] 이후로도 미라쥬 등의 다양한 모델을 내놓으며 그럭저럭 잘나가고 있었다. 특히 1979년부터는 크라이슬러 호주 지부를 인수해 미쓰비시 차종의 현지생산도 주도했고, 미국에서는 크라이슬러와 합자를 내서 1985년에 '다이아몬드 스타 모터스'라는 법인을 차린 뒤 차량을 공동으로 설계, 생산, 판매하기도 했다.[4]​1978년부터 2011년까지는 토요타 등 다른 일본 자동차 회사들처럼 차급에 따라 세분화된 딜러[5]를 갖추기도 했는데, 랜서, 미라주, 콜트등은 '카 프라자점'(Car Plaza)에서 팔았고, 갤랑은 말 그대로 갤랑 전문점에서 팔았다고 한다. 2012년부터는 이런 형태를 폐지하고 다시 미쓰비시 대리점으로 단일화한 상황.​파제로, 샤리오, RVR 등을 내세워 1990년대에 RV의 미쓰비시라는 별명까지 붙을 정도의 호황을 기록한 바 있다.​1980년대 CM송을 대부분 마츠토야 유미가 담당했다고 한다. 이렇게 마케팅에서도 선전을 했다지만...3. 방만한 경영과 몰락[편집]​1990년대 초부터 파제로와 랜서 에볼루션으로 전 세계의 각종 랠리에서 연전 연승을 거두고, 말레이시아의 자동차회사인 프로톤[6]에 차량 생산에 대한 각종 기술을 제공하고, 유럽의 푸조-시트로엥 그룹과 볼보, 그리고 현대자동차에 자신들의 휘발유 직접분사 엔진 기술을 제공하는 등 '기술의 미쓰비시'라는 이미지로 닛산을 압박하고 뒤이어 혼다와 경쟁하며 일본 내 2등 자동차 회사라는 타이틀을 거머쥘 것만 같았지만, 경영진들의 나태와 오만은 1990년대 후반부터 미쓰비시를 구렁텅이로 몰아넣기 시작했다. 실제로 당시 상담역이자 전 회장이었던 구보 도미오[7]도 말년에 현대차와 비교하면서 임원들을 타박할 정도었다. #​르노 인수 직전의 닛산자동차 못지않게 동일한 플랫폼으로 개성없는 여러 가지 모델을 만들어내서 팔았으며,[8][9] 1980년대부터 '달리는 실러캔스'[10] 라는 치욕적인 별명과 함께 말아먹기 시작한 고급차 시장은 현대자동차와 손을 잡은 뒤에도 마케팅 실패, 품질 문제 등으로 여전히 좋은 평가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현대차는 그 모델을 가지고 대성공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차량의 품질은 계속 하락했으며 이에 반해서 차량의 부품값은 굉장히 높은 편이었다.​그래도 이전에 승승장구했던 미쓰비시 자동차는 이미 1996년부터 경영진들의 나태와 오만이 드러나고 있었다. 그 나태와 오만은 1996년 4월 미국 일리노이 주에 있는 자회사에서 터진 성희롱 사건 때 극명하게 드러났다. 미국인 여직원 약 300명이 직장 내에서 상습적 성희롱을 당해왔다며 집단 고소한 것이다. 미쓰비시는 3400만달러(약 380억원)라는 성희롱 소송 사상 최대의 화해금을 물고 사건을 종결지었으나 회사 이미지는 치명적 타격을 입었고 덩달아 미국 내 매상도 감소하고 만다.3.1. 리콜 은폐[편집]2000년대 초, 자사에서 생산했고, 생산중이었던 120만 대[11]의 차량들에 중대한 결점[12]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은폐해 오다가 운전자의 사망 사고 후 언론 보도를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되어 기업 이미지가 나락으로 떨어지면서 판매량 및 매출에 엄청난 타격을 입었으며[13] 회장이 경찰에 체포당하고 회사가 도산 직전까지 갔다.[14][15]​이후 대대적인 공개 사죄 이후 어려운 상황에서도 꾸준히 신모델을 내놓으면서 어느정도 회복은 한 상황이지만 현재 사정이 그렇게 좋은 편은 되지 못하며, 어려운 사정임에도 불구하고 모회사인 미쓰비시에서는 방관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더더욱 난처한 상황이 계속되었고, 지금의 몰락까지 왔다고 한다. 실제로도 미쓰비시 그룹 내에서의 미쓰비시 자동차의 비중은 의외로 굉장히 작다고.[16]​2012년에는 네덜란드 현지공장을 폐쇄했고, 2015년 9월 25일에는 끝내 미국 일리노이 현지공장 폐쇄가 결정되어 외국 생산 거점을 잃게 됐다.3.2. 연비 조작[편집]2016년 16년 전 일로 아직 정신을 못 차린 것인지 연비를 조작한 것이 발각되었다. 처음에는 현 판매 중인 경차 2종[17]이 발각된 것으로 시작되었으나, 추가로 밝혀진 바에 의하면 무려 1991년부터 조작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즉, 1991년 이후 일본 국내에 출시한 거의 모든 차종의 '연비'를 불법적인 방법으로 측정해왔다는 뜻이다. 미쓰비시, 거의 전 차종 연비 불법 측정&quot아사히​과징금이 1000억엔(...)이 넘을 것으로 전망되었고, 결국 2016년 5월 새로운 주인이 된 르노-닛산 얼라이언스에서 2000억엔을 출자해 과징금 해결을 보면서 미쓰비시 자동차를 인수하기로 결정났다. 배상금이 조단위라 스케일이 다르다.3.3. 구조선 찾기[편집]원체 1990년대 중후반부터 기존의 지분 관계에 있어 제일 큰 대주주가 다임러-크라이슬러였다. 물론 이 시기 전 1980년대부터 이미 크라이슬러와도 엔진이나 주요부품 등에서 협력관계를 맺어왔고, 크라이슬러도 미쓰비시 자동차의 주주로 참여하고 있었다.[18] 그리고 1990년대 중후반 크라이슬러를 다임러-벤츠가 인수하여 다임러-크라이슬러가 되자, 그룹의 주축인 다임러-벤츠 측에서는 크라이슬러와 관계를 맺고 있었던 미쓰비시를 다임러의 아시아 기지로 쓰기 위해 승용과 상용 부문을 몽땅 인수했었고, 현대자동차와도 손을 잡았었다.[19][20] 하지만 결국 다임러 벤츠 측에서 크라이슬러를 털어내면서 2005년 주식을 모두 매각하고 미쓰비시에서 손을 떼었으며, 대신 수익을 그럭저럭 잘 낸 상용차 부문인 미쓰비시 후소만 계획대로 제대로 인수합병했다. 조금 더 말하자면, 미쯔비시 자동차는 다임러-벤츠가 주축인 다임러크라이슬러에서 전폭 지원해 주는 와중에서도 몰락을 거듭하는 중이었고, 그러던 중 크라이슬러와 지지고 볶던 다임러 벤츠가 크라이슬러와 결별하면서 다임러-크라이슬러 그룹이 와해되자, 벤츠는 미쓰비시 승용부문에서 손 떼버리고, 대신 대형 상용차 부문인 미쓰비시 후소만 인수하여 다임러 그룹 내의 상용차 부문 아시아 기지로 재탄생시킨 것...[21]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미쓰비시 그룹 측에선 미쓰비시 중공업을 비롯한 그룹 내 자회사들의 경영까지 걷잡을 수 없는 상태에서 자동차 부문이 악화일로를 걷게 되자 더더욱 난감한 상황이 되었는지라 이제는 승용차 부문을 아예 내놓은 자식 취급한다. 그러면서 푸조-시트로엥이나 현대-기아 등 다른 기업들이 인수하려 하면 선뜻 안 내놓는게 문제​앞서 말했듯 자동차 부문 경영악화에다 미쓰비시 중공업을 비롯한 그룹 내 자회사들의 경영 악화로 지원이 힘들어지자 기존의 대주주인 다임러측은 주식을 증자했고, 이 주식을 푸조가 사들임으로서 대주주 명단에 푸조가 올라가게 되었다. 덕분에 푸조에 자사의 소형 SUV와 전기차를 공급하는 협력관계가 성립되었다. 당시 대주주인 푸조가 한때 얼라이언스를 제의했으나 미쓰비시 측에서 거절했다.[22] 그럼에도 SUV와 전기차 플랫폼 제공 등의 협력은 앞으로도 계속 할 예정이라고 한다.​그러다가 2015년부터 르노-닛산 얼라이언스와 협력을 하기로 최종 결정함으로써 미쓰비시의 기함 프라우디아[23]/디그니티를 비롯한 중대형 세단들을 닛산 리뱃지 형식으로 내수 생산하고, 전기 자동차와 신형 세단의 개발·생산에 있어서 파트너쉽을 맺기로 하였다.[24] 결국 이러한 이유로 르노삼성의 부산 신호동 공장 생산라인에서 미쓰비시의 일부 차종들이 새로 혼류생산될 예정이라고 했었다. 출처 그러나, 부산공장에서 혼류생산하기로 한 라인업이 미쓰비시와 르노-닛산 간의 이견차로 중단되어 버림으로써 출처 미쓰비시의 새 중형차 개발은 또다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업계에서는 최근 엔화 환율로 인해 우리나라보다 일본에서 생산하는 비용이 더 저렴한 것으로 나타나자 미쓰비시가 마음을 바꾼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 지금 이게 사실이라면 미쓰비시 스스로 복을 차버린 셈이다.​그렇게 르노-닛산 간의 협력도 잠깐 동안 불발되었다가, 연비조작 뻥카가 드러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2016년 5월 12일이 되자 닛산자동차가 허겁지겁 미쓰비시자동차 지분 34%의 2370억엔어치 주식을 사들이고, 덤으로 과징금도 전액 배상해 줌으로써 드디어 미쓰비시자동차의 최대 주주가 되었다. 그리하여 미쓰비시자동차는 현재 르노-닛산 얼라이언스의 4번째 새로운 일원[25]으로 편입된 상황이다. 참고1 참고2 그리고 미쓰비시자동차의 주가는 다음날부터 천정부지가 되고 있다링크 참고​결론적으로 르노-닛산 그룹에 레이싱 특화 브랜드가 하나 더 들어간 셈이며, 미쓰비시측의 기술이 닛산은 물론이고 모기업인 프랑스의 르노와 계열사인 한국의 르노삼성에게도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업계에선 예측하고 있다. 다만 반대로 현재 미쓰비시의 기술력이 전기차 같은 일부 기술을 제외하면 현행 차량들과 비교해볼때 많이 홍콩 미러 급 레플리카 낡은 감이 있고, 미쓰비시에게 실질적으로 남은 것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르노와 닛산에게 차체와 기술력을 받아와서 이전의 낡은 차체와 기술력을 모조리 뒤엎고 새로운 르노닛산의 차체와 엔진들로 라인업을 부활시킬수 있다는 전망도 있다. 또한, 이제 미쓰비시 자동차가 본격적으로 르노-닛산 얼라이언스의 새 일원이 되었기에, 엎어졌던 계획이었던 르노삼성 부산공장의 미쓰비시 중형차량 혼류생산 계획도 다시 진행될 수 있다는 분석이 있다. 이러한 점에서 경제전문가들과 차덕후들은 팝콘 들고 헌데 내부 사정이 흉흉해서 루마니아 다치아 공장에서 혼류생산 하려나? 이 상황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다.3.4. 급한 불은 껐지만[편집]2016년 르노-닛산에게 인수되어 한시름 놓았지만, 그럼에도 현재는 예전의 명성을 찾을 길이 없는 수렁에 빠진 상태이다. 차량의 경쟁력도 부족한 상태며, 신차는 뜸하고 차량의 완성도 또한 경쟁업체에 비하면 떨어지는 상태. 오죽하면 북미에서 근래 발전중인 현대자동차가 더 나아보인다는 평가까지 나오고 있다. 플랫폼 노후화&부재로 세계 시장에서 중형급 이상에서 갤랑, 데보네어, 프라우디아가 전부 단종되며 완전히 철수했고 매년 전년 대비 30%로 판매량이 감소하는 등으로 힘겨운 세월을 보내는 중이다. 2011년 제네바 모터쇼에서는 사실상 소형 플랫폼으로의 집중을 선언하며 중형급 포기를 기정사실화했으나 2012년부터 일본 내수시장에 닛산의 일부 모델을 도입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미드십 엔진 형식의 경차 i[26](전기차 버전은 i-MIEV) 등이 시장에서 선전하며 안정화에 기여하고 있으나, 판매량은 일본 내수 시장 부동의 꼴찌 수준이다. 반대로 경차는 닛산과의 합작법인 NMKV를 통해 닛산 배지 모델을 OEM 납품하고 있다.​다만 앞으로 주목받을 시장인 전기자동차 시장에 대비한 기술력을 상당히 빠르게 키워놓은 상황이라, 무시할 수 있을 만한 상황은 아니다. 현재 일본 자동차 회사 중 가장 먼저 전기자동차인 i-MIEV를 내놓고 판매하고 있다. 하지만 판매량은 그저 안습.리프가 버티고 있잖아​상황이 이런지라 전통의 모터스포츠 부분에서는 이미 2008년 일찌감치 철수했고, 자사가 직접 하던 렌터카 사업[27]도 축소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에서도 2014년 북미 시장에서 사라질 브랜드 리스트에서 볼보와 미쓰비시 자동차를 언급했다. 하지만 볼보는 포드와 결별 후 차이나머니를 통해 화려하게 부활했고, 미쓰비시는 그야말로 철수는 안 했지만 아무도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2014년에는 자사의 간판 모델인 란에보의 단종을 발표했으며, 2015년에는 그 베이스 모델이 되었던 랜서 역시 단종 수순을 밟으면서 사실상 과거의 명성을 전부 잃어버렸다.​2019년 4월에는 파제로의 일본 내수 판매를 중단한다고 발표했다.​다만 세계 최초로 4WD SUV 모델의 PHEV를 발표하여 곧바로 상용화하고 세계 각지의 랠리에서도 다시금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데다가, 하이브리드 및 전기자동차에 대한 기술력이 상당해, 자금력만 뒷받침된다면 어느 정도 가능성은 있다고 할수있다.3.5. 생존의 방법[편집]전술했듯 아무것도 남지 않은 상황이긴 하지만 르노-닛산 얼라이언스의 아시아 주축인 닛산자동차가 2016년 5월 현재 미쓰비시자동차를 인수했다. 이로 인해 자동차 업계나 언론에선 르노닛산이 미쓰비시와 영향을 어느정도 주고 받으리라는 예측이 나오고 있다.​크게 두가지로 예측하고 있는데 첫번째는 과거 미쓰비시 자동차의 레이싱이나 자동차 관련한 여러 기술들이 모기업인 르노는 물론이고 미쓰비시 자동차를 데려간 닛산과, 르노의 한국 기지인 르노삼성자동차에게도 기술적으로 여러 가지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업계에서는 분석하고 있다. 사실 르노와 닛산도 레이싱에서 잔뼈가 굵었지만 미쓰비시 역시 이들과 만만치 않을 정도로 실력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간 파제로 등으로 쌓아온 4륜구동 명성이 아직 다 죽은것은 아니기에 르노, 닛산, 르노삼성에게도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예측이 적지 않다. 참고1 참고2​두번째로는 르노와 닛산이 엔진과 차체를 미쓰비시에게 제공하여 새로운 라인업을 만들게 할 수도 있다는 전망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미쓰비시의 기술력은 전기차나 4WD 기술을 제외한 일반 차량 기술력에 한해서는 현행 차량들과 비교해볼때 많이 낡은 감이 있고, 인수가 있기 전에 미쓰비시 자동차에선 자신들이 신차를 제작하지 못해서 몇몇 닛산의 차를 들여와 배지 앤지니어링으로 판매한적이 있기 때문이다.[28] 그래서 이전에 남아있던 낡은 차체와 엔진들 싹 갈아엎고 르노와 닛산이 새로운 차체와 엔진을 제공해서 다시 미쓰비시 라인업을 만들어내길 바라는 의견들도 적지 않다.​2020년 7월 27일, 미쓰비시 자동차가 공식적으로 유럽시장 철수 선언을 했다. 미쓰비시는 2020년 1분기 동안 12억 9천만 파운드[29]의 손실을 입었고, 유럽시장 기준 미쓰비시의 점유율은 1%에 남짓해 상대적으로 점유율이 높은 동남아시아 시장에 집중하겠다고 한다.# 미쓰비시의 유럽시장 전면 철수는 이미 예견되어 왔었는데 이미 2012년도 네덜란드에 위치한 연간 20만대의 생산 능력을 갖춘 공장을 수요 부진, 신차 라인업의 노후화 및 경영난으로 인해 폐쇄하였고, 미래 사업전략 재검토에 돌입하였지만 이후 7년만에 끝내 버티다 못해 유럽시장을 전면 철수하게 된 것이다. 미쓰비시 이사회에 의하면, 자사는 향후 3년동안 회사의 고정 비용을 최대 20% 줄일 계획이며, 유럽시장에서 철수하는 것과 더불어 생산 인력 구조조정, R&D 비용 삭감, 2021년까지 파제로를 생산하고 있는 일본 사카호기 공장 폐쇄 및 모든 생산 설비를 오카자키 공장으로 이전하는 계획을 수립한다고 한다.4. 대한민국과 미쓰비시의 인연[편집]4.1. 현대자동차와의 미운정 고운정[편집]1973년 당시 미쓰비시 자동차는 일본의 자동차 시장에서 입지를 다지기 위해 자금이 필요했고, 마침 이웃나라 신생 기업이었던 현대자동차에서 자동차 기술 전수를 골자로 한 기술 제휴를 미쓰비시 측에 타진하게 되면서 두 회사의 인연이 시작된다.​본래 미쓰비시 자동차는 1965년에 한국시장 진출을 희망하면서 신진자동차와 기술제휴를 하려고 했었으나 이 과정에서 신진자동차가 미쓰비시 콜트 1500 승용차 100대를 들여오면서 특혜 논란에다가 신진자동차의 폭리 논란도 일파 만파로 번지게 되었고[30], 이 와중에 토요타가 신진자동차를 꼬드겨서 1966년에 기술제휴 계약을 체결하는 바람에 미쓰비시 자동차는 신진자동차와의 기술제휴는 수포로 돌아가고 8년 후 현대자동차와 기술제휴를 체결할 때 까지 기다려야 했었다.​기술제휴가 체결된 후 미쓰비시 자동차는 현대자동차의 기술적인 스승 역할을 하였으며, 이들의 기술 종속 관계는 실질적으로 30년 가까이 유지되었다가 마지막 합작 모델인 에쿠스 1세대가 단종되었던 2008년에서야 완전히 끝나게 된다. 당시 국내 자동차 제조사와 기술 제휴 관계에 있었던 다른 외국 자동차 회사들의 태도에 비하면 미쓰비시 자동차는 현대자동차에게 꽤나 잘 해준 편에 속하였다. 덕분에 현대자동차는 1980년대 부터 1990년대 중후반까지 미쓰비시 자동차가 설계한 플랫폼과 파워트레인을 베이스로 하여 상품성을 높인 모델들을 대거 출시하면서 국내 및 해외 시장에서 승승장구 하게 된다. 하지만, 현대자동차에서 자금 조달 문제로 미쓰비시 자동차에 부품 대금 결제를 주식으로 대신하게 되면서, 미쓰비시 자동차가 현대자동차 대주주로 올라서게 되고 현대자동차에서 자체 추진중이던 독자엔진개발을 중단시키기 위해 경영일선에 개입하여 내부적으로 방해를 시도하였던 정황들도 있었다.​미쓰비시는 결함 은폐건으로 인해 회사가 도산 직전까지 가자 현대자동차의 미쓰비시 인수설까지 나돌았을 정도였다. 미쓰비시 측에서는 현대와 협력하여 재기하고 싶어했으나 결국 못했다고 한다. 현실의 벽은 높다. 현대 역시 합병을 해보려 고려했지만 결국 하지 못했다고 한다. 원체 미쓰비시 그룹 자체가 과거 전범기업인데다 사죄에 대해서는 인색한지라, 만일 미쓰비시 자동차 부문만 현대가 인수한다 해도 전범기업을 형제로 들이느냐&quot라고 많은 사람들이 반대했을 수 있는 일이다.[31] 어차피 한참 미쓰비시가 오늘내일 할때인 2000년대 초반에는 1997년 외환위기와 형제의 난의 영향으로 현대차도 썩 상황이 좋다고만은 할 수 없었다.​그러나 몰락을 거듭한 지금은, 고급차 부문에서 닛산 푸가를 OEM 방식으로 공급받아 기함인 프라우디아와 디그니티 신형을 만들게 되었다. 게다가 르노-닛산과 공동개발하는 중형 세단을 대한민국의 르노삼성자동차 부산공장 생산라인에서 만들 계획에 있으며, 최종적으로는 미쓰비시 자동차가 경쟁사인 르노삼성의 모기업인 르노-닛산 얼라이언스에 인수가 된다.4.2. 정작 들어왔더니 망했어요[편집]







대한민국에서는 2008년 9월 대한민국 진출 이후 10월 랜서 에볼루션과 아웃랜더의 판매를 시작했고, 11월에는 이클립스 쿠페를 선보였으나 당시 엔고 환율까지 덮치면서 2008년 10월 53대, 11월 7대, 12월 5대라는 판매량의 위엄을 보여주며 (2008년 11~12월 초기 선보였던 랜서 에볼루션과 아웃랜더를 월별로 각각 1대씩밖에 못파는 막장테크를 탔다!) 진출 첫 해에 철수 위기를 겪었다. 이후에는 매월 수십대 정도의 매출은 유지하고 있으나 판매 부진으로 딜러가 이탈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등 안습한 상태다. 2010년 기준으로 랜서(갤랑 포르티스)의 가격은 3,000만원 전후(옵션에 따라 2900만원대)의 가격을 책정했으나, 랜서 에볼루션은 6000만원이 넘는 가격이 책정되어 원성을 많이 들었다. 국내 판매된 미국사양 랜서 에볼루션이 TC-SST에 S-SWC까지 달린 MSRP 45,000불의 풀옵션 사양이였고, 환율 영향도 있으나 시장의 기대수준이 4,000만원 중반이였다는 것이 문제였다. 베이스가 된 일반형 랜서도 판매하였으나 국산 준중형과 비교해도 나을 바 없는 품질로 시장의 철저한 외면을 받았고[32] 영업사원들의 사정인지 나중에는 신차가 대량으로 중고차 시장에 대거 유입되는 안습의 상황까지 발생했다. 상황이 이쯤되니까 갤로퍼의 원판 모델 파제로가 국내에 발매되었다는 건 아무도 신경조차 안썼다. 결국 철수 고려 중이라는 안습한 기사가 나왔다. 미쓰비시만이 아니라 스바루 등 일본차가 전반적으로 대한민국에서는 맥을 못추는 편이긴 한데,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2011년 4월 7일 일본 미쓰비시 자동차의 국내 공식 수입사인 MMSK가 사업을 접고 청산 절차에 들어갔다. 극심한 판매 부진으로 2011년 1분기 실적이 34대에 불과할 정도로 영업 적자가 심각하며 이와는 별도로 대주주인 대우자동차판매가 워크아웃에 돌입하는 등 악재가 겹쳤다. 홍콩 미러 급 레플리카 MMSK는 자본 잠식률이 93%에 달해 기업으로서의 생존력이 없는 상태였다. 미쓰비시 자동차에서는 새로운 대한민국 수입사를 선정한다고 하지만..... 우린 안 될 거야 아마.​결국 MMSK가 청산되고 나서 새로운 업체가 그 자리를 메웠는데, 범 한진그룹 계열인 CXC 모터스가 그 자리를 잡았다. 참고로 CXC 모터스의 대표인 조현호는 한진그룹 창업주인 조중훈 회장의 조카다. 2012년 3월 16일 대한민국에 재진출하였으며 한국수입자동차협회에 따르면 재진출후 2012년 4월까지 등록 및 판매 0대로 단 1대도 팔지 못했다. 2012년 수입차 시장은 독일제 고급 디젤 세단이 급부상하면서 일본차들이 모두 부진하긴 했지만 그 중에서도 미쓰비시 자동차는 2012년 상반기 판매 대수는 22대, 그것도 상당수는 내부 직원 판매로, 일반 소비자 판매는 한자릿수에 불과했다.​결국 2013년 CXC 모터스는 전시장을 폐쇄하여 한 곳만 남은 상태고 이마저도 재고 처분 후에 폐쇄할 예정으로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있다. 결국 2013년 7월 한국 영업을 잠정 중단했다. CXC 측은 잠정 중단일 뿐 재철수가 아니라지만 명백한 사망플래그. 2013년 10월 CXC 모터스와 계약이 종료되면서 대한민국에서 다시 철수했고 때문에 대한민국 호갱 구매자들은 보증 수리같은 AS 서비스를 받지 못한 채 버림받은 상황이다.[33]4.3. 르노삼성을 통한 부활?[편집]그러나, 현재 르노 닛산 얼라이언스가 미쓰비시를 인수한 상황이니 이제 르노삼성을 통해서 미쓰비시 차들을 A/S받거나 고칠 수도 있다는 예측이 나오고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르노삼성에서 승용 부문 부족한 라인업을 미쓰비시에서 들여와 리뱃징해서 채울 수도 있다는 예측도 나오고 있다. 그 외에도 르노삼성에서 생산되는 차량을 역으로 미쓰비시 라인업으로 리뱃징해서 수출할 수도 있다는 업계 분석도 있다. 원체 닛산이 미쓰비시를 인수하기 전 협력관계일때 르노삼성의 부산 신호동 공장에서 미쓰비시 브랜드의 중형차를 혼류 생산한다는 계획이 실제로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계획은 잠시 엎어지긴 했지만 이제 미쓰비시 자동차가 르노닛산 얼라이언스의 일원이 되었으므로 미쓰비시의 세단들이 르노삼성을 통해 플랫폼과 기술 교류를 하거나, 르노삼성 공장에서 본격적으로 혼류 생산되리라는 분석이 있다.​이런 것을 쉽게 예를 들자면 (아직 실제 일어난 일은 아니고 예를 든 것이다.) 현행 2016~2017년식 미쓰비시 파제로 롱보디를 QM6 그랜드, 파제로 숏보디를 QM6 큐빅이라는 이름[34]으로 한국에 들여온다거나, 역으로 SM6를 리뱃징하여 미쓰비시 갤랑이나 미쓰비시 디아망떼로 일본, 북미, 남미에 수출한다고 생각하면 되겠다.​그러나, 르삼과 협력을 하긴 하더라도, 브랜드 공식수입 자체는 안될 가능성이 높다. 이전에 한국시장에서 존재감 없는 인지도, 팬들 울리는 가격, 불성실한 서비스, 전범기업의 그림자로 2번씩이나 미역국을 먹고 또다시 공식으로 수입한다면 오히려 더 역효과만 부를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쓰비시 그룹에서 르노-닛산 얼라이언스로 본적을 옮기긴 했으나, 전범기업의 먼지를 완전히 털어낸 것이 아니기에 더더욱 미쓰비시 브랜드 자체로 판매하기가 힘들다. 그래서 미쓰비시의 차를 도입을 하거나 조립생산을 하게 된다면 르노삼성 상표와 차명으로 교체하는 배지 엔지니어링 과정을 거칠 것이다. 만약 미쓰비시 차가 국내에 생산되더라도 닛산 로그 2세대의 전례처럼 수출 전용으로 돌리게 될 것이다. 일부에서는 르노삼성이 경차로 르노 트윙고를 들여오려다가 국내 경차규격을 초과하는 문제로 포기한 적이 있었기에, 이참에 미쓰비시의 경차를 리뱃징해서 르노삼성이 판매하는 길을 모색할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 단 이는 가능성이 낮은 것이, 미쓰비시의 경차는 현재 일본에서 수출하는 모델이 없기 때문에 우측통행 모델을 새로 설계해야 한다.​르노닛산의 미쓰비시자동차 인수 초기엔 르노삼성의 준중형 플랫폼을 바탕으로 새로운 미쓰비시 랜서(후속)를 제작하기로 닛산 측에서 발표를 했다고 영문 위키에 쓰여있었다.[35] 이렇게 랜서가 부활한다면 미쓰비시 랜서 에볼루션도 르노삼성 차대 기반으로 부활시킬수 있다는 것이 유력했었다. 란에보 : 뭐라고 내..내가 서민 3호기라니! 3호기라니! 말도안돼! 그러나 7월 이후부터는 르노삼성 플랫폼을 바탕으로 한다는 계획에 대한 말이 영문위키에선 지워져 있다. 르노닛산과 미쓰비시 측에서도 이렇게 발표를 했다가 아니다가 왔다갔다 번복하는 이유는 아직 정식 인수만 했고 르노-닛산 얼라이언스의 플랫폼과 기술협력을 받을 것이란 계획만 잡혔지 아직 어떤 플랫폼을 쓸지 어떻게 개발할지는 정해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더 자세한 것은 두고 봐야 할 일. 위키참조​우선은 르노 닛산 얼라이언스에게 인수된 사실과 르노 또는 르노삼성에서 제작한 차체들이 새로운 미쓰비시 차량의 생산 기반이 될 것이라는 것 외에는 아직 정해진 것이 없으니 조금 더 지켜봐야 할 듯. 르노-닛산 얼라이언스 측에서는 미쓰비시 브랜드를 최대한 존중해 준다고 했으나, 한 그룹 일원이 된 이상 서로간의 기술협력과 공유는 당연히 이루어질 듯.​2018년경에 출시 예정이었던 미쓰비시의 주력 차종인 아웃랜더의 차기 모델이, 닛산 엑스트레일과 플랫폼을 공용, 종래의 GS 플랫폼에서 닛산 CMF로 변경된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 때문인지 출시시기가 2019년경으로 늦춰졌다고 한다. 이후로도 소형 플랫폼의 공용 역시 검토하고 있다는 것이 알려져, 미쓰비시의 전 모델이 리뉴얼이 예상되고 있다. 차라리 다치아 브랜드를 붙이는 게 낫겠다.5. 성룡하면 미쓰비시[편집]1980년대 중반부터 홍콩의 영화배우 성룡과 제작협력 관계를 맺기 시작하여, 성룡의 해외진출과 함께 가히 전 세계적인 PPL 효과를 보았다. 미쓰비시 자동차 모델이 성룡의 영화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1984년 영화 쾌찬차부터이며, 이후 용형호제, 폴리스 스토리, CIA, 빅타임 등에 이르기까지 성룡이 출연하는 영화의 상당수에 자사의 자동차 모델이 등장하였다. 1995년작 영화 성룡의 썬더볼트는 대놓고 미쓰비시 자동차 홍보영화 수준에 가까울 정도로 PPL의 정점을 이루었다. 경쟁자용 레이싱카를 제외하고서는 영화에 투입되는 차량들을 거의 대부분을 지원했고, 오프닝에서처럼 주인공 설정이 미쓰비시 자동차의 드라이버 연수생으로 되어 있으며, 심지어는 성룡이 홍콩에서 운영하는 정비공장의 견인차조차도 미쓰비시 모델일 정도였다. 실제 이 견인차는 미쓰비시 후소에서 만든 캔터라는 모델로, 현대자동차의 2톤~3.5톤급 중형트럭 모델인 마이티의 초기 모델은 캔터의 라이센스 버전이었기에 앞부분을 보면 익숙한 이들도 있을 것이다. 빅토리녹스에 맥가이버가 있다면 미쓰비시에는 성룡이 있다.​하지만 지금은 성룡의 버프로도 일어서기 힘든 상황이다보니, 차이니스 조디악에 잠깐 출연한 미쓰비시 파제로 이래로 신차를 볼수 없었지만, 2017년에 공개되는 신작에, 콘셉트 XM-PHEV를 기반으로 개발되는 소형 미니밴이 등장한다는 소식이 알려졌다.6. 생산차량[편집]6.1. 승용[편집]미라쥬 (Mirage)아트라쥬그랜드 랜서랜서 (Lancer)[36]i/i-MIEV (i/i-MiEV)콜트 (Colt)[37]콜트 플러스 (Colt Plus)eKeK X[크로스오버SUV]eK 스페이스 (eK Space)eK X 스페이스[크로스오버SUV]6.2. 상용차[편집]타운박스미니캡6.3. SUV/RV[편집]RVR (RVR)이클립스 크로스 (Eclipse Cross)엑스팬더 (Xpander)아웃랜더 (Outlander)파제로 스포츠 (Pajero Sport)[40]트라이톤 (Triton)델리카 D:5 (Delica D:5)델리카 D:2 (Delica D:2)징거[41]7. 단종차량[편집]7.1. 승용[편집]미니카 (Minica)프레시스 (Precis)[42]트레디아(Tredia)카리스마(Carisma)[43]에테르나 (Eterna)갤랑 (Galant)아스파이어 (Aspire)에메로드 (Emeraude)디아망떼 (Diamante)시그마 (Sigma)마그나/베라다 (Magna/Verada)데보네어 (Debonair)프라우디아 (Proudia)7.2. 스포츠카[편집]FTO (FTO)랜서 에볼루션 (Lancer Evolution)이클립스 (Eclipse)스타리온 (Starion)GTO (GTO)7.3. SUV/RV[편집]리베로 (Libero)[44]디온 (Dion)샤리오 (Chariot)레그넘 (Legnum)그란디스 (Grandis)델리카 (Delica)델리카 스페이스 기어 (Delica Space Gear)파제로 (Pajero)8. 컨셉 카[편집]HSR 시리즈 - HSR은 Highly Sophisticated-transport Research의 약자. 이 중 3번째인 HSR-3는 신세기 GPX 사이버 포뮬러 TV판 29,30화에 자율주행 자동차로 나왔다.​[1] 닛산자동차 지분 34%으로 르노-닛산-미쓰비시 순의 지배관계가 성립한다.[2] 제3자배정 증자를 통하여 닛산자동차가 2373억엔에 미쓰비시 지분의 34%를 확보하였으며, 미쓰비시 계열사는 우호 지분으로서 기존 지분을 10년간 유지하는 조건. 미쓰비시의 지분은 미쓰비시 상사 9.23%를 포함해 20.8%이다. 자연스럽게 미쓰비시그룹에도 계속 소속된다.[3] 크라이슬러 그룹의 소형차 라인을 보충해주면서 미쓰비시의 미국 진출로를 열어준 계기인 동시에, 미쓰비시에게는 한동안 미국에서 자체 브랜드 진출이 막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4] 미쓰비시 이클립스가 다이아몬드 스타 모터스에서 만들어진 첫 차종 중 하나였다.[5] 1970년대부터 일본 자동차 회사들은 모델 다양화에 맞춰 대리점을 다각화했다. 주로 기존의 '고급 모델'과 새로 출시되는 저가 모델을 따로 파는 데서 시작했다.[6] 1994년에 로터스를 인수한 회사다.[7] 久保富夫. 미쓰비시 중공업/자동차에서 전설적으로 통하던 사람이다. 1931년 동경대 공학부를 졸업하고, 미쓰비시 중공업 비행사업부로 입사뒤에 바로 Ki-46 100식 사령정찰기 개발 주임을 맡았고. 전후에는 자동차 사업부로 이적해 공장장에서 회장까지 올라간 사람이다.[8] 갤랑 플랫폼으로 에테르나, 레그넘을 만들었으며, 랜서 플랫폼으로 미라지, 카리스마를 만들었다. 근데 갤랑과 에테르나, 레그넘이라던가 랜서와 미라지는 말이 좋아서 형제차지 실상은 그냥 같은 차에 이름만 바꿔서 파는 배지 엔지니어링 수준이었다. 특히 1996년 이후 모델들은 닛산 못지않게 어느 차가 오리지널이고 어떤 차가 변형모델인지 구별도 못할 정도였다. 그 중 미쓰비시 카리스마는 볼보 S40 1세대와 동일한 모델이었고 네덜란드에서 생산됐다.[9] 단, 랜서와 미라쥬는 특정 딜러점 전용으로 가지치기된 모델들이며 당시 일본에서는 딜러점 다각화 정책으로 인해 같은 차종을 딜러점 채널별로 조금씩 손봐 판매하는 경우가 흔했다. 당시 혼다도 준중형 세단 하나를 도마니, 시빅 페리오, 인테그라 SJ로서, 중형 세단 하나를 아스코트와 라파가로서 일부만 조금씩 손질해 판매했으며, 다각화 정책을 유지해온 토요타 역시 1990년대 당시의 코롤라와 스프린터는 물론, 현재의 알파드와 벨파이어, 복시와 노아 및 에스콰이어 등의 차들도 전, 후면부와 인테리어 배합, 파워트레인만 다르게 한 한 차종 돌려막기식이다.[10] 1964년에 나와 1986년까지 22년 동안 판매된 1세대 데보네어를 말한다. 이후 1986년에 들어서야 2세대 모델을 개발하였고, 이것이 현대 그랜저로 팔렸다. 다른 별명은 '미쓰비시 그룹 중역 전용차'.[11] 승용차 갤랑, 파제로, 파제로 이오, 랜서(란에보 포함), 델리카 스페이스 기어 163,707대, 대형 상용차 더 그레이트, 슈퍼 그레이트, 에어로 에이스, 에어로 킹, 에어로 퀸, 홍콩 미러 급 레플리카 에어로 에이스, 에어로 스타 1백만대[12] 휠을 고정하는 볼트가 깨져서 타이어가 튀어나갔다. 그것도 대형 트럭(!)이 결함으로 야채를 싣고가던 트럭이 고속도로 요금소를 들이받아 운전자가 사망한 사고와 튀어나온 타이어에 아이 어머니가 맞아 어머니가 그자리에서 죽고 아들은 크게 다친 사고가 발생했다.[13] 때마침 12개월 동안 0퍼센트 할인, 0퍼센트 이자, 0달러 선납금이라는 0-0-0 마케팅을 했었는데, 이 사태 덕분에 수많은 사람들이 0-0-0 마케팅으로 산 차를 중고로 다시 팔아버리는 바람에 미쓰비시는 심각한 손해를 감수해야만 했다.[14] 지금도 몇몇 언론에서 설문조사나 의견조사를 하면 일본인들 대부분은 미쓰비시의 결함은폐에 대해 회사 책임자가 그 상황에서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차라리 우리 전통대로라면 책임자가 할복이라도 했어야 할 상황이다라고 했을 정도다. 이는 실제로 모터트렌드 코리아에서도 일본내 시민들에게 자동차 회사들에 대한 이미지 조사를 할때 나온 말이기도 하다.#. 게다가 2002년에는 25만대를 넘던 일본 내수 판매량도 2017년에는 7만대 이하로 까지 떨어졌다... 출처 얼마나 막장이었으면 같은 일본 소비자들까지 등을 돌릴까?[15] 이 사건은 한자와 나오키 시리즈로 유명한 이케이도 준의 소설 '하늘을 나는 타이어(空飛ぶタイヤ)'의 모티브가 되었다.[16] 다만 2차대전 후 일본 대기업 집단에서 각 계열사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관례를 두고 보면, 오히려 2005년에 지분의 30%에 달하는 출자를 해 준 게 이례적이다.[17] 배지 엔지니어링으로 닛산자동차의 이름으로 판매된 것까지 포함하면 4종이다.[18] 이 시기 크라이슬러 차종 중에서는 미쓰비시에서 제작된 엔진을 크라이슬러가 자사 입맛에 맞게 튜닝하여 얹은 차들도 적지 않았다. 그만큼 긴밀한 관계였던 셈. 포드도 가끔 야마하에서 엔진을 주문해 오긴 하지만 그보다 더했다 보면 되겠다.[19] 이 당시 다임러크라이슬러 홈페이지에서 보면 벤츠, 크라이슬러, 미쓰비시 자동차가 한 그룹으로 속해있었고, 현대자동차는 협력(Joint Venture)로 표시되어 있었다고 한다. 물론 잠시동안이지만....사족으로 이 시기엔 현대가 상용차 부문에서 벤츠의 엔진을 가져다 쓰기도 했다. 자세한 내용은 현대 그린시티 문서 참조.[20] 또한 당시는 다임러크라이슬러 그룹이 계속 굳건하다고 믿었기에 다임러 벤츠 측에서는 상용차부터 승용차 부문 전 라인업 기술 협력의 초석으로, 맨 먼저 현대의 상용차 부문과 협력을 야금야금 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이를 지켜보던 쌍용은 엄청 난감했었을듯 물론 크라이슬러와 벤츠 간의 여러 문제로 다임러크라이슬러가 와해되고 나서는 결국 중단되고 말았지만...[21] 미쓰비시 상용차 부문은 계속 유지하기로 하여 앞으로도 다임러가 벤츠가 계속 소유중이다. 본문에서도 서술했지만 미쓰비시 그룹 내에선 에선 승용 부문이 갈수록 병크로 치닫고 있었고, 그나마 승용부문에 비해 수익을 더 잘 내는 쪽이 상용차 부문이었다. 승용차 부문에 비해 수익도 잘 내고 일도 잘 하던 미쓰비시 상용차 부문인 미쓰비시 후소를 당연히 벤츠는 포기할 수 없었고, 미쓰비시 후소를 메르세데스 벤츠 상용차의 아시아 기지로 키워내기 위해 지분인수를 늘려 자회사로 만들었다.[22] 아마도 푸조 측에서 르노-닛산 얼라이언스를 보고 대항하려는 계획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회사간 이해관계와 유로화 약세 등의 문제로 PSA 측과 미쓰비시는 자본제휴를 그만두게 되고, 경기회복 후에 다시 지분협력을 하겠다고 밝혔다. 과연? 출처[23] 과거 1세대를 현대 에쿠스와 공동 개발했던 그 프라우디아 맞다. 현재 2세대는 닛산 푸가/닛산 시마를 마크만 새로 바꿔서 프라우디아라고 팔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정작 일본 내에서 판매량이 신통할 것 같지는 않아보인다.출처[24] 우선 일본 언론에서도 토요타와 독일 폭스바겐, 미국 제네럴 모터스로 구성된 3강 체제에서 르노닛산과 미쓰비시 연합이 더해진 4강 체제로 재편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라고 하며 이전까지의 미쓰비시의 제휴들이 실패였다고 까는 점을 봐서는 차라리 미쓰비시측도 이번 협력만큼은 안정적인 자본제휴나 매각으로 이어지길 바라는 속내인듯도 하다. 하기사 이전까지는 협력이고 나발이고 뭐 하려고만 하면 전부 망했어요 루트를 타니 출처[25] 르노삼성자동차, 다치아, 라다에 이은 4번째 르노닛산 계열 브랜드.[26] 스마트 포투에 들어가는 1.0리터 가솔린 터보 엔진이 i에 장착되는 엔진이다.[27] 일본은 자동차 메이커가 직접 렌터카 사업을 하는 경우가 많다[28] 일례로 앞서 전술했듯 자사의 기함인 프라우디아 2세대를 자신들이 제작하지 않고 닛산 푸가 세단을 들여와서 리뱃징만 해서 만들고 있는 것이 그 좋은 예.[29] 한화로 약 1조 9천여억원[30] 당시 콜트 파동이라고 불렸는데, 한편으로는 제2의 새나라 자동차 파동이라고 하기도 했을 정도로 파장이 컸었다.[31] 물론 언론 플레이로나마 전범기업의 몰락&quot내지 과거 전범행위의 댓가&quot비슷하게 분위기를 조성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게 된다면 인수 이후에 미쓰비시 자동차와 갈등을 빚을 여지가 생겼을 것이다.[32] 심지어 일본 영사관, 주한일본대사관 차량 중 일제차조차도 미쓰비시는 거의 없고 죄다 렉서스, 도요타, 혼다, 닛산, 인피니티뿐이다.(...) 그만큼 일본에서 온 외교관들조차도 미쓰비시 차를 안 샀다는 소리.[33] 국내 관련법에 의하면 수입차 및 수입 제품 공식 딜러의 철수 이후 6년간은 의무적으로 A/S를 해줘야한다고 한다. 현재 닛산과 올림푸스가 그 상태이다. 하지만 고작 1년간 영업해서 무슨 노하우가 있을까 싶고 2020년 현재 그 6년의 기간도 끝나버려 진짜 낙동강 오리알이 되어버렸다. 차는 제대로 고치지도 못하지 그렇다고 중고로 팔자니 중고 가격도 너무 형편 없다(...)[34] 일반 QM5가 단종된 대신 신형 콜레오스는 후속 QM6가 되기로 확정되었다. 다만, 이런 식이라면 오히려 파제로를 들여오기보단 신형 콜레오스를 한국엔 QM6, 일본에는 최신형 파제로 또는 파제로 스포츠로 도입할 수도 있다는 예측도 있다.[35] 원문은 ;[36] 중화권에만 판매되며, 일본 국내는 왜건 타입 랜서 카고가 판매중.[37] 본래는 미라쥬의 수출명 중 하나였지만, 2002년에 그 후속으로 유럽식 해치백이 등장하자 콜트로 통일되었다. 2012년에 단종되었으나 지금은 타이완 현지에서 콜트 플러스를 판매하고 있다.(#)[크로스오버SUV] 38.1 38.2[40] 영문 표기대로라면 파제로 스포'트'가 되겠지만, 외래어다보니 '트'발음에 대해 ツ(츠) 또는 トゥ(토우=투) 또는 ト(토) 중에서 적당히 선택해서 쓴다. 그래서 미쓰비시 측의 표기는 パジェロスポーツ 로 표기되어있다.[41] 대만의 CMC(中華汽車, 1969년 설립)를 통해 생산 중.[42] 당대 미츠비시와 현대의 협업 관계에서, 미츠비시 미라쥬의 플랫폼으로 개발된 현대 포니 액셀이, 아메리카에서 다시 미츠비시 프레시스로 전개되었다.[43] 볼보 S40의 자매차. 현재의 미츠비시의 상황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지만, 미츠비시 카리스마가 오리지날 모델이다.[44] 영문 철자도 같기는 하지만, 동명의 한국제 트럭과는 관계가 없다. 이쪽은 90년대 중반에 전개된 랜서의 스테이션 왜건 자매차.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마쓰다최근 수정 시각: 2020-11-28 10:30:47​일본의 자동차 브랜드[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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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명칭마쓰다 주식회사(マツダ株式会社)영문명칭Mazda Motor Corporation설립일1920년기업형태주식회사업종명상용차 및 엔진 제조업CEO고가이 마사이치 (小飼雅道)회장가나이 세이타 (金井誠太)소재지히로시마현 아키군 후추정홈페이지홈페이지​​マツダ株式会社Mazda Motor Corporation1. 개요[편집]일본의 자동차 기업. 본사는 히로시마에 있다.​일본 내 3강(토요타/혼다/닛산) 4약(미쓰비시/스즈키/스바루/마쓰다)으로 구분하는 자동차 기업 규모 중 4약에 속하는 회사이다. 생산규모는 2016년도 기준 154만 대. 소형 승용차를 주력으로 생산, 판매하고 있으며 RX-7과 같은 스포츠 모델이 두터운 매니아층을 형성하고 있는 고정 팬이 많은 회사이다.​과거 미국 포드 모터 컴퍼니의 계열회사로 있으면서 제휴선인 한국 기아자동차의 모델에 베이스를 제공한 바 있다. 2017년 8월 토요타와 제휴관계를 맺기로 발표했다.[1] 공교롭게도 토요타의 자회사인 히노자동차도 과거 기아자동차의 기술 제휴선이었다.[2]2. 상세[편집]







도요공업 시절부터 1975년까지 쓰던 마쓰다 구 로고로 삼륜차나 R360같은 초기 경차 모델에서 볼 수 있다.[3]







마쓰다에서 대표적인 차량 중 하나. 스포츠카인 RX-7이다. 이니셜D의 타카하시 케이스케의 애마, 명탐정 코난에서 사토 미와코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자동차 등으로 대중매체에서의 출연도 잦은 편이다.​모태는 코르크 마개를 생산하던 도요 코르크 공업으로, 1920년에 창업했다. 회사 규모가 커지면서 1927년 도요 공업으로 사명을 변경했으며, 당시에는 삼륜차뿐 아니라 일본군의 하청을 받아 다양한 군수물자를 생산하던 기업이었다. 1940년대에는 다른 전범기업들처럼 조선인 징용자들을 끌고 와서 착취했으며, 이들 중 상당수가 히로시마 원자탄 투하의 희생자가 되기도 했다.[4]​1984년에 현 사명인 마쓰다로 변경했다. 이름은 조로아스터교의 신인 아후라 마즈다에서 딴 것으로, 1931년 삼륜 트럭을 개발하면서 붙인 것이다. 실질적 창업주인 마쓰다 주지로(松田重次郎)의 성을 로마자로 표기한 MATSUDA를 서구인에게 받아들이게 쉽게 썼다고 할 수 있다.[5]​1950년 4륜 트럭을 생산하고, 1960년 'R360 쿠페'라는 경차를 선보이면서 본격적으로 자동차 회사의 이미지를 굳히기 시작했다. R360부터 '마쓰다'는 회사의 메인 브랜드로 자리를 잡았다.​이 회사의 가치는 단연 로터리 엔진(반켈 엔진)이다. 1961년 서독 NSU[6]의 기술을 들여와 개발·생산을 시작한 이래 전 세계 자동차 생산 기업 중 유일하게 로터리 엔진을 얹은 스포츠 모델을 많이 생산하여 판매하고 있었지만, 배기가스 규제로 2012년부터 더 이상 생산하지 않는다. 수소를 이용한 로터리 엔진도 콘셉트로 개발해 보기도 했다. 특유의 저배기량에 고출력 특성으로 매니아층을 끌어모으고 있는 주된 요인으로, 장점보다 단점이 더 큰 엔진 특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꾸준히 단점을 개선해 오면서 성능을 올려 왔지만 RX-8이 단종되면서 현재는 그 행보가 멈춰져 있는 상태. 대신 기존 가솔린 엔진의 효율을 크게 올린 '스카이액티브(SKYACTIV)'엔진 라인업을 선보이면서 효율성 높은 파워트레인을 속속 신차를 통해 선보이고 있으며, 홍콩 미러 급 레플리카 일본 내 자동차 업체 중 가장 적극적으로 승용차 라인업에 대한 디젤 엔진의 도입을 시도하고 있다.​마쓰다 브랜드 외에도 유노스, 앙피니, 오토잼, 오토라마 등의 브랜드 디비전이 있었지만, 일본의 버블 경제가 무너지면서 대부분 폐기되고 만다. 이 무렵 포드에 인수된다.​1996년 포드가 지분을 33.4%까지 올려 산하로 편입되었으나, 2008년 리먼 쇼크 이후 포드가 현금 확보를 위해 주식을 매각하여 이후로는 기술협력관계 수준만 유지하는 상황. 포드가 먹었다 뱉은 회사들 대부분이 그러하듯, 2012년 이후 내놓은 차들이 호평을 받으며 성공세를 이어 나가는 중이다.​디자인 측면에서는 과거부터 묘하게 왜색이 짙어 보이는 디자인이 특징이다. 특히 이러한 느낌은 1980년대 후반~1990년대 디자인에서 잘 드러나는데 모티브를 일본 전통 가면에서 따 왔다고 밝힌 1세대 NA MX-5와 이니셜 D의 주력차량 중 하나로 유명한 RX-7 FD3S 모델 등으로 확인할 수 있다.​2000년대 중반 이후부터 '고도(魂動, Kodo)[7][8]'라는 새로운 디자인 언어를 도입하고 스카이액티브 테크놀로지라는 새로운 엔진 기술의 개발로 디자인과 성능 측면에서 큰 쇄신을 이끌어 내었으며 아텐자/마쓰다6, 악셀라/마쓰다3, 4세대 MX-5 등 이 시기 이후로 개발된 차량들은 디자인과 성능 양면에서 국제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2012년에 RX-8이 단종됨으로 인해 로터리 엔진을 사용한 양산차량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데, 2015년 도쿄 모터쇼에 등장한 RX 비전 컨셉트카를 통해 대외적으로 스카이액티브 기술과 결합한 차세대 로터리 엔진의 개발을 천명하였다. FD3S RX-7의 그것을 계승한 디자인으로 매니아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발표시 2020년경 양산 계획이 타진되었으나 아직 현실화되지는 않았다.​​1980년 일본 내수용 타이탄[9]과 봉고 CF. 참고로 저 아저씨는 야마시로 신고(山城新伍)이다.[10]​2016년에 한국 진출을 목표로 하고 있었지만, 이후 이야기가 더 없는 걸로 보아 흐지부지된 듯하다.​2018년 8월 9일 일본 국토교통성의 조사에서 연비 및 배출가스 측정 검사에 '부정'을 저지른 것이 발각되었다. 일본 스즈키 마쓰다 연비 조작…국토교토성, 강력 제재 방침 일본車 '품질 신화'송두리째 흔들…닛산·스바루 이어 스즈키·마쓰다·야마하도 배기가스와 연비 조작 # ##실제로 해외에서 보면 마쓰다의 차량 중에 근래 현대 기아차와 비슷한 디자인의 차를 많이 볼 수 있다. 근 몇년간 꾸준히 비슷한 모양의 차가 나오는데 (실제 외국에서 지나가다 보면 한국 모델인가 해서 보면 마쓰다 마크가 붙은 경우가 꽤 있다. 비슷한 예로 포드의 요즘 일부 차량과 기아자동차의 모델들이 그릴 디자인의 유사성 등으로 인해 흡사해 보인다.), 마쓰다가 디자인 벤치마크를 하는 것인지 디자인 트렌드의 수렴으로 인한 것인지는 불분명.3. 스포츠[편집]과거 자회사로 자사 모델의 튜닝/드레스업 파츠를 개발하고 모터 스포츠 담당 사업을 관리하는 마쓰다스피드(MAZDASPEED)가 있었다. 1991년 르망 24시간 레이싱에 팀의 감독으로 참가했던 오오하시 타카요시가 이곳 출신. 전신은 마쓰다의 딜러였던 마쓰다 오토 도쿄 내의 모터스포츠 상담실. 과거형이 된 것은 법인인 주식회사 마쓰다스피드가 1999년에 마쓰다에 흡수되는 형태로 없어졌기 때문.히로시마현에 본사가 있으며, 동 지역 연고의 프로야구단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대주주다. 정확히는 이 기업이 대주주인 것은 아니고, 기업 오너 일가가 대주주다. 구단명의 '도요'가 이 회사의 옛 명칭인 도요공업에서 따온 것. 본래 시민구단으로 운영되던 히로시마 카프 프로야구단이 재정난으로 해체 위기에 처하자, 히로시마 시민들이 구단 좀 맡아 달라고 탄원해서 일단 구단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다른 구단처럼 구단 운영에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고, 지분 보유와 경영진 파견 정도만 하는 상태. 그냥 적자만 많이 내지 말고 알아서 하라는 중이며, 구단 총 연봉액이 20억 엔을 넘기지 않아야 한다는 압박도 넣고 있다. 그 덕에 구단이 자기 힘으로 벌어서 먹고 살아야 되는 건 여전하다.[11] 그래서 1990년대 이후 히로시마 도요 카프는 선수들에게 투자는커녕 있는 선수도 지키지 못해서 팜에서 애써 키운 뛰어난 선수들을 FA로 줄줄이 유출시키는 등,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나마 위안거리는 열심히 선수팔아 제껴서 40년 연속 흑자 기록(...)을 써나가고 있다는 점과 2013년부터 팀 성적이 괜찮아지고 있다는 점. 그 외에는 J리그 프로축구팀 산프레체 히로시마의 스폰서 겸 대주주이기도 하다.2009년에 개장된 히로시마시의 새 홈 구장 이름도 마쓰다 줌줌 스타디움 히로시마. 최근 지방에 있는 야구장 신축을 둘러싼 돔경기장 떡밥에 항상 이렇게만이라도 지어 달라고 예로 드는 구장이다.1991년 르망 24시간 레이스 우승팀이며, 이 때의 레이스카가 바로 그 유명한 마쓰다 787B. 이는 일본 메이커로서는 사상 최초이자 2018년 토요타가 우승하기 전까지 유일한 르망 24시간 레이스 우승이었고, 이후로는 실린더형 왕복기관 이외의 동력기관 사용 금지라는 규정이 새로 걸리면서 로터리 엔진 경주차로는 최초이자 유일한 우승이라는 전무후무한 업적을 달성한다.1992년~1995년 배서스트 12시 4연패를 달성한 기록을 갖고 있다. 이후에도 미쓰비시, 아우디가 2연패까지는 해봤으나 3연패 이상을 못 한 것을 보면 얼마나 무시무시한 시절이었는지 가늠이 될 것이다.미국 캘리포니아주 몬터레이에 위치해있는 라구나 세카 레이스웨이와 2001년부터 2018년까지 17년간 스폰서십을 체결했던 바 있다. 현재는 자동차 종합용품 브랜드인 웨더텍으로 스폰서가 변경되었지만 아직까지도 마쓰다 레이스웨이 라구나 세카라는 이름을 익숙해하는 사람들이 많다.2002/03 ~ 2004/05 시즌까지 이탈리아 프로축구팀 AS 로마의 스폰서였다.2020년, 3를 베이스로 한 3 TCR 투어링카를 발표했다. 실전투입되면 지역에 따라서 i30 N TCR이나 벨로스터 N TCR과 맞붙어볼 가능성도 있다.4. 기타[편집]배틀피버 J부터 시작해서 1980~1990년대 슈퍼전대 시리즈의 차량협력은 이 회사가 거의 전담했으며 최근에 협력한 작품은 바로 폭룡전대 아바렌쟈이다.[12][13]​2006 LA 오토쇼 때 '나가레'라는 스포츠 컨셉트 카를 출품했다. 나가레(Nagare)는 일본어로 흐름(流れ)을 뜻하는 단어로, 이후에 발표된 타이키, 류우가, 하카제, 후라이 등의 컨셉트카와 함께 마쓰다의 미래 디자인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했던 바 있다. 실제로 이후에 생산되는 마쓰다 양산차의 디자인이 이들 컨셉트카의 디자인 언어를 계승한다.​히로시마 시내에 마쯔다 뮤지엄, 자동차 박물관을 무료로 운영중이다. 전시내용은 상당히 알차서 공장견학[14]과 함께 지금까지 마쓰다가 출시한 모델 전라인업과 로타리 엔진을 비롯 스카이액티브, 르망24 우승차 787B등을 전시중에 있다. [15] 일본어와 영어로 안내투어가 진행되며 방문관람은 예약제이며 인원제한이 있다. 방문기​2020년 회사 창립 100주년으로 그란 투리스모 스포트에 마쓰다 RX-비전 GT3 컨셉을 공개 및 수록했다. 2015년 도쿄 모터쇼에서 공개한 RX-비전을 토대로 GT3 규정에 맞는 반켈 엔진 레이스카를[16] 가상으로나마 구현한 것이다.5. 역사[편집]1920년 1월 - 동양코르크공업주식회사로 설립.1921년 3월 - 2대 사장 마쓰다 주지로 취임.1927년 9월 - 동양공업주식회사로 사명 변경.1931년 10월 - 삼륜트럭 마쓰다호 생산 개시.1945년 8월 6일 - 히로시마에 원폭 투하. 마쓰다의 공장은 궤멸을 면했으며. 1946년 7월까지 히로시마현의 행정 기관을 회사 부지에 이전.[17]1950년 6월 - 소형사륜트럭 CA 발매.1951년 12월 - 3대 사장 마쓰다 코지 취임.1957년 1월 - 생산 누계 20만대 돌파.1960년 5월 - 경차 R360쿠페 발매.1961년 7월 - NSU, 방겔 사와 로터리 엔진 기술제휴.1962년 3월 - 베르토네와 승용차 기술제휴.1963년 3월 - 생산 누계 100만대 달성.1965년 12월 - 본사지구와 우시나지구 사이에 동양대교 준공.1966년 11월 - 우시나지구에 승용차 전담 공장 설립.1967년 5월 - 로터리 엔진을 처음 탑재한 코스모스포츠 발매.1969년 1월 - 생산누계 300만대 돌파.1970년1월 - 닛산자동차 ・동양공업 ・포드가 연합하여 일본자동변속기주식회사(자트코JATCO)[18] 설립, 출자율은 포드 50%, 닛산 25%, 동양공업 25%.4월 - 미국에 자동차 수출 개시.11월 - 4대 사장 마쓰다 코헤이 취임.1972년11월 - 우시나 제2 공장 준공.12월 - 생산누계 500만대 달성.1975년 1월 - 태국에서 현지 조립 개시.1977년 12월 - 5대 사장 야마자키 요시키 취임.1978년3월 - RX-7 발매.11월 - 로터리 엔진 차 생산만 100만대 달성.1979년6월 - 생산누계 1000만대 돌파.11월 - 포드가 동양공업 주식24.5%를 취득.1981년 12월 - 오토라마 설립.1984년5월 - 사명을 마쓰다주식회사로 변경.11월 - 6대 사장 야마모토 켄이치 취임.1985년 1월 - 미국에 생산법인 MMUC를 세움.1986년 4월 - 로터리 엔진차 150만대 생산 달성.1987년4월 - 생산누계 2000만대 달성.6월 - 요코하마에 기술연구소 설립.12월 - 7대 사장 후루타 마사타다 취임.1989년5월 - 유노스, 오토잼 설립.9월 - 유노스 로드스터(마쓰다 MX-5) 발매. 마쓰다모터스판매점을 폐업시키고 판매 채널을 마쓰다점, 마쓰다오토점, 오토라마점을 추가해 총 5채널로 세분화.1990년 4월 - M2 설립.1991년6월 - 제59회 르망24시에서 마쓰다787B로 1위.11월 - 마쓰다오토채널을 재편성.12월 - 8대 사장 와다가 취임.1992년2월 - 제2공장 조업개시.6월 - 미국에 세웠던 생산회사 MMUC의 사명을 오토얼라이언스인터네셔널(AAI)로 변경 후 포드의 합병기업화.1993년 12월 - 포드와의 신전략협력관계 구축 발표.1995년4월 - 생산누계 3000만대 돌파.11월 - 타이에 오토얼라이언스타일랜드(AAT) 설립.1996년4월 - 판매채널 유노스를 마쓰다점으로 통합.6월 - 포드의 지분율을 33.4%로 격상. 9대 사장에 포드 출신 헨리D. G. 워레스 취임.1997년 6월 - 싱가포르 진출.2012년 8월 - (12년 8월 29일) 대한민국 국무총리실에서 일제 강점기 강제 동원에 관여했던 일본전범기업으로 확정했다.[19]6. 생산/판매 차량[편집]일본내 판매명과 해외 판매명의 차이가 있다.캐롤(CAROL): 경차, 스즈키 알토의 뱃지 엔지니어링스크럼(SCRUM): 경승합차/경트럭, 스즈키의 캐리/에브리의 뱃지 엔지니어링플레어(FLAIR): 박스형 경차, 스즈키 왜건 R의 뱃지 엔지니어링플레어 왜건(FLAIR WAGON): 톨보이 타입 경차, 스즈키 스페이시아의 뱃지 엔지니어링플레어 크로스오버(FLAIR CROSSOVER): 경 SUV, 스즈키 허슬러의 뱃지 엔지니어링데미오/마쓰다 2(DEMIO/MAZDA 홍콩 미러 급 레플리카 2): 소형 세단/해치백[20]악셀라/마쓰다 3(AXELA/MAZDA 3): 준중형 세단/해치백프레마시/마쓰다 5(PREMACY/MAZDA 5): 중형 미니밴아텐자/마쓰다 6(ATENZA/MAZDA 6): 중형 세단/왜건[21]VX-1: 중형 미니밴, 스즈키 에르티가의 뱃지 엔지니어링(인도네시아 전용)로드스터/미아타/MX-5(ROADSTER/MIATA/MX-5): 스포츠카MX-30: 2020년 10월 출시된 SUV. 문서 추가바람.CX-3: 소형 SUVCX-4: 소형 쿠페형 SUVCX-5: 준중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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